*경주 계림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사적)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계림은 신라의 國號(국호)로도 쓰이게도 되었다. 펑퍼짐한 숲에는 느티나무 등의 옛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지고 북쪽에서 서쪽으로 작은 실개천이 돌아흐른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후에 박씨 왕족인 파사왕에게 왕위가 계승되어 왕이 되지 못했고, 후대 내물왕대부터 신라 김씨가 왕족이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신라 왕성 가까이 있는 신성한 숲으로 신라 김씨 왕족 탄생지로 신성시되고 있으며 지금도 계림에는 왕버들과 느티나무가 하늘을 가릴 듯하다. 대릉원-계림-반월성으로 이어지는 산책로옆에는 봄이면 노란 유채꽃이 유적지의 운치를 더 깊게 해준다.
계림비각
계림은 신라의 신성한 숲이라 해서 지금까지 보존됐으며, 1803년(조선 순조 3년)에 세운 김알지 탄생에 대한 비석이 남아 있다. 사적 제19호
*월정교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에 지어졌던 교량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된 것을 2018년 4월 국내 최대 규모의 목조 교량으로 복원하였다.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163-1에 위치하는 통일신라시대의 교량(橋梁)으로, 조선시대에 유실되어 없어진 것을 고증을 거쳐 2018년 4월 복원을 완료하였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19년(760년)에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경주 월성과 남산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1984년 11월 26일부터 1986년 9월 8일 까지 진행된 두 번의 복원설계를 위한 자료수집과 발굴조사를 통해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음을 처음으로 확인하였고, 2008년부터 2013년까지의 공사로 길이 66.15m, 폭 13m, 높이 6m의 교량 복원이 완료되었다. 2016년 4월부터 시작된 다리 양 끝의 문루(門樓) 2개동을 건립하는 공사를 진행하여 2018년 4월 준공되었다.(대한민국 구석구석)
(월정교에 얽힌 요석 공주와 원효대사의 러브스토리)
*진평왕 39년에 압랑군 남쪽 불지촌의 율곡 사라수 밑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이가 바로 원효대사인데 원효대사는 출생부터 남달랐다. 어머니가 원효를 가졌을 때 별똥별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해산할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 이렇게 태어난 원효대사는 어린시절 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 청년이 된 원효대사는 29세에 출가하여 영축 산 남지, 훙류낫 연기, 반용산 보덕 등을 찾아 수행하다가 34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려고 하였다. 당나라로 가는 배를 타기위해 당항성으로 가던 길에 날이 저물어 동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잠결에 목이 말라 물을 한 그릇 마셨는데 너무 달고 맛있어서 기분 좋게 잠들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 물이 해골에 고인 썩은 물인 것을 알고 급히 토하다가, '모든 것은 자기 마음에 있다'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신분이 낮은 농민이나 천민들과 어울려 함께 일하고 함께 놀면서 불법을 전하였다. 원효대사의 이름이 이미 신라에 널리 알려졌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원효가 아침부터 미친 사람처럼 거리를 쏘다니며 큰 소리로 이런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주겠는가 나는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으련다" 사람들은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이때 태종(무열왕)이 노래를 듣고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스님께서 아마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자식을 낳으려 하신 모양이구나. 그런 분의 자식이라면 영특할 것은 틀림없고, 나라에 훌륭한 인재가 생기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지." 마땅한 여자가 없을까 궁리하던 무열왕은 마침 요석궁에서 혼자 살고 있는 공주를 떠올랐다. 왕은 신하들을 시켜 원효대사를 요석궁으로 데려오게 했다.
관리들이 원효를 찾아 나섰을 때, 원효는 이미 일이 그렇게 될 줄 알고 먼저 문천교 다리로 나가 기다렸다. 저 편에서 관리들이 보이자 원효는 모르는 척하고 다리를 건너오다가 일부러 발을 헛딛고 물에 빠졌다. 관리들은 허겁지겁 원효를 건져 내서 요석궁으로 데려갔다. 원효는 젖은 옷을 말린다는 핑계를 대고 옷을 벗고 궁에서 머물렀다. 요석공주는 처음엔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스님답지 않은 자유분방한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둘은 함께 밤을 보내게 되었다. 얼마 후 공주가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바로 유명한 설총이었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어찌나 총명하였던지 어릴 때 이미 유학과 역사에 통달했다. 그는 이두문자를 만들어서 그 때까지 중국어로만 통하던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우리식으로 표현할 수 있게끔 했다.
원효대사는 파계해서 설총을 낳은 후로는 속세 사람들이 입는 옷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 소성거사라 했다. 또 광대들이 가지고 다니는 둥근 박에 여러 가지 도구를 장엄하여 무애라 이름 짓고 가지고 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염불하였으므로 가난 하고 무지몽매한 사람이라도 모두 부처를 알게 되었고 갓난아이들까지도"나무아미타불"을 모르는 자가 없게 되었다. 이 때 부터 신라에서는 누구나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였고, 백성들은 고달픈 삶에 위안을 얻게 되었다. 스스로가 붙인 원효라는 법명은 부처님의 세상을 처음으로 빛나게 하다 라는 뜻인데 원효대사가 이룬 업적을 생각할 때 참으로 그 이름대로임을 알 수 있다. 원효는 이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부처의 가르침을 전했을 뿐 아니라 화엄경과 금강산매경에 대한 해설을 써서 후세에 길이 도움이 되게 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원효대사와 요석공주 (문화원형백과 한국설화 인물유형, 2005., 문화원형 디지털콘텐츠)
최치원 글씨(북쪽 문루에 걸려있는 현판)
김생 글씨(남쪽 문루에 있는 현판)
원래는 남쪽 문루에만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월정교 복원 공사로 남,북 양쪽에 현판을 걸었다 합니다
이는 두분의 친필로 된 문헌에서 월.정.교 글씨를 따 와서 서각한 것이라 하네요
야경 명소로 알려 졌다 하는데 저희 일행은 시간관계상 야경을 볼 수 없어 아쉬웠습니다
향교 마당에 있는 우물(총명수) 이 물을 마시면 총명해진다 하는데 ㅋㅋ
* 경주 교동 법주
경주지방의 전통 가양주. 경주시 교동의 일명 '경주 최부자네' 집안에서만 이어져 내려온 법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86-3호로 지정
경주 교동 최부자네집에서 이어져 내려오는 법주이며 전통 가양주로써 대대로 전수 시켜오고 있다(찹쌀,밀누룩,집뜰의우물물이 쓰이며 일제강점기 와ㅏ 해방 이후 맥이 끊길 뻔 했으나 지금까지 가내 사업으로 전수 되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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